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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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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2019. 9. 7. 15:12

"비가 오길 간절히 소망해 봐. 그리고 네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거야.

어렵지 않아. 자, 들어봐. 빗방울이 꽃잎 위를 경쾌하게 두드리는 소리, 나뭇잎이 신이 나 몸을 흔드는 소리, 귀찮아하며 가지를 툭툭 터는 커다란 나무와 한가득 비를 품고 웃는 부드러운 흙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어.

구름이 같이 놀자며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도, 저 멀리서 시샘하는 태양이 흥흥 콧방귀를 뀌며 멀리 떠나자 곁에 불쑥 다가와 고개를 내미는 그림자가 보이니?

귀를 기울여봐.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처럼 바라보는 거야.

어때? 수많은 언어가 네 곁에 쏟아지고 있지 않니?"

 

 

 

 

1. 르네 로르젤(Lynette Lohrzehl)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꽃에 물을 줄 거예요. 서른 그루의 나무를 지나면 작은 샘이 나와요. 그 샘을 빙 둘러 더 걸어가면, 그러니까 여섯 그루의 나무를 또 지나가면 넓고 아름다운 꽃밭이 나와요. 정말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 있어요. 제 친구는 그걸 흐…흩어…흐트러지다? 흐드러지다? 여하튼 그렇게 말했어요. 제 친구는 저보다 나이도 많고, 아주 많은 책을 읽어서 어려운 단어도 척척 써요. 정말 정말 어른스럽죠? 제 친구는 머리카락이 분홍색인데 저번에 본 꽃이랑 비슷해서 예쁜 화관을 만들어 줬어요. 요새 기침을 자주 하는 것 같아서 큰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아, 맞아. 꽃이 아주 많은데, 거기에 물을 주러 갈 거예요. 물을 어떻게 주냐구요? 음,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인데요, 제 다른 친구는요, 물이랑 정말 친해요. 얼마나 친하냐면, 비가 왔으면 좋겠다~ 라고 소원을 빌면 잠시 후에 이슬비가 내려요. 정말이에요. 그럼 꽃잎에 앉아 있는 아주 작고 반짝이는 날개를 단 친구들이 웃으면서 좋아해요. 흩어지는 작고 여린 빗방울을 모아 동그란 공을 만들어 놀기도 하구요. 그러면 꽃들도 신나서 춤을 춰요. 초록 이파리와 무지개를 닮은 꽃잎이 덩실덩실 흔들흔들 얼마나 즐거운지 아시나요? 모른다구요? 그럼 오늘 꼭 보여줄게요!

 


 

2. 에'레비(E'Levi)

 

 맑음! 내일도 맑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비가 싫은 건 아니야!

 오늘은 레리가 처음으로 숲에 왔던 날이야. 어떻게 기억하냐면, 르네가 알려줬어. 그치만 나도 아~ 그랬구나~ 하고 떠올렸으니까 나도 기억하고 있었던 거 맞아.

 오늘 르네랑 레리랑 같이 꽃밭에 갈 거야. 르네는 꽃밭에 이름을 붙이자고 했는데, 레리는 뭐든 다 좋대. 나랑 르네랑 열심히 후보를 만들었는데, 레리가 다 좋다고 해서 결국 공평하게 아무것도 안 붙이기로 했어. 그러니까 꽃밭의 이름은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아서 아무 이름도 없는 꽃밭' 인 거야!

 르네가 꽃밭에 물을 주고 싶다고 해서, 레리랑 같이 가기로 했어. 레리는 많이 아픈데, 괜찮아졌다가도 갑자기 기침을 막 해. 너무 아픈데 꽃밭에 가고 싶다고 해서, 나랑 르네가 손잡고 같이 가기로 했어. 가서 레리가 많이 웃고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왜냐면 나는 친한 물 친구들이 있어서, 레리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 만큼만 비를 내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거든. 르네랑, 레리랑, 요정이랑… 아주 많은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 거야!

 


 

3. 레테 리슈아(Lethe Lishua)

 

 기침을 한동안 달고 살았더니 목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 병마에 시달리며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특기인 집안의 핏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탓이겠거니 한다.

 차도가 없자 작은 친구들이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침대 양쪽에 매달려있다. 저렇게 보니 꼭 책갈피를 꽂아 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럼 나는 책인가? 마침 꼬리도 달려 있겠다, 가름끈이나 다름없어 제법 그럴싸한 상상이 됐다.

 아주 대단한 선물을 준비했다며 입가를 씰룩이는 레비와,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엄격한 척 하지만 볼이 씰룩거리고 있는 르네를 보고 웃음을 참아낸 나 자신이 대견했다. 때맞추어 기침이 터져 다행이라고 조금 생각하긴 했지만.

  자연과 감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둘이 뭘 준비했을지 눈에 선해서 모르는 척 준비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저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인데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아 얌전히 누워있었다. 작은 친구들의 정성만큼만 더 건강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더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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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your name? (3)  2019. 9. 7. 15:03

*네임버스 기반

 

 

 

 매서운 바람이 굳건한 벗으로 자리한 이슈가르드에서는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술을 물처럼 마셨다. 물자가 귀한 이슈가르드에서 깨끗한 물은 재력의 동의어였다. 하층에 가까울수록 물은 금보다 귀했고, 상층에 가까울수록 물은 홀대받기 일쑤였다. 귀족은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차를 즐겼고, 매 정찬(正餐)에는 술을 즐겼다. 우아한 문화에서 차와 술, 향신료는 언제나 빠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석찬(夕餐)이 마무리될 무렵 요리사들이 섬세하게 조각된 새하얀 잔을 은쟁반에 조심스럽게 받쳐나온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매끄러운 표면에는 은은한 광택이 흐르고 있었고, 리슈아의 문양이 놀라우리만치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척 보아도 보통의 값어치가 아니었으나 레리는 무심한 눈길로 잔을 들 뿐이었다. 르네가 작게 감탄하며 잔을 들었다.

 

 모든 이들이 잔을 들기를 기다렸던 주방장이 긴장된 얼굴로 레리의 지시를 기다렸다. 고개를 까닥 기울인 레리가 입술만 적실 만큼 음료를 마셨다. 레리가 기울였던 잔을 입술에서 뗌과 동시에 주방장이 입을 열었다.

 

 “드라바니아 용의 눈물과 홍옥해의 진주를 녹여 만든 진액에 생강즙과 사탕무 즙을 섞어 정수한 최상급의 포션입니다. 떨어진 체온을 올려주고 마나의 흐름을 안정시키며 소화를 촉진하는…….”

 

 주방장이 굵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레비와 르네는 뭐의 눈물? 어디의 뭐? 무슨 즙? 왜? 왜 이런 것을? 하는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타고난 귀족인 레리와, 그 귀족의 식솔로 오랜 시간 지낸 사용인들은 능숙하고 깔끔하게 못 본 척을 했다.

 

 “담아내는 음식에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도록 특수 가공하여 제작한 잔입니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광택과 섬세한 장식은 리슈아 특유의 독특하고 고급스러운 기술이지요. 교황청에 납품하는 최고급의 코코아 가루가 들어가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수고했군.”

 

 “영광입니다. 부디 만족스러운 정찬이 되셨길 바랍니다.”

 

 주방장이 멋들어진 모양새로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 뒤를 따라 긴장된 모습이 역력한 요리사들도 물러갔다. 미지의 것을 향한 르네와 레비의 두려움과 호기심, 모험가다운 열렬한 탐구심이 손을 뻗게 했다. 몸에 좋다잖아! 그래! 눈을 꼭 감은 두 고양이의 귀가 삐죽삐죽 흔들렸다. 레리는 느긋하게 음료를 홀짝이며 만찬의 여운을 즐겼다.

 

 “맛있어…."

 

 “맛있다….”

 

 기대 이상의 만족이었는지 두 미코테가 느긋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의자에 파묻혔다. 두 뺨이 상기된 르네와 레비가 줄어드는 음료의 양을 아쉬워하며 연신 홀짝거렸다. 손바닥보다 작은 잔은 겨우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더 길었을까? 이렇게 조그만 잔에 어쩜 이렇게 섬세한 조각을 새길 수 있는지 놀라웠던 르네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레비는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배부른 고양이의 웃음을 지었다.

 

 “이거 진짜 맛있다. 무슨 눈물하고 진주? 그런 거 들어갔다고 해서 괴식인 줄 알았는데.”

 

 “굳이 따지자면 추출물이야. 성분만 뽑아낸 거니까 상관없지. 본래의 것보다 더 좋아.”

 

 “응, 진짜 맛있어. 적당히 달고,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상쾌해.”

 

 “이슈가르드 특산물인가?”

 

 “따지자면 우리 집 특산물.”

 

 눈을 반짝거리며 경청하는 두 친구의 모습에 레리가 살짝 웃었다. 이슈가르드의 귀족이라면 몇 개씩 가지고 있는 특유의 레시피 중 하나다. 모 백작 가의 그라탱, 어느 자작 가의 밀크티, 엄선된 귀족 가에 납품하는 유명한 요리사의 키쉬와 스푸 같은 것들. 돈 귀신이 붙은 리슈아에서 귀족적인 문화를 놓칠 리 없다. 리슈아만의 독자적인 식문화는 성도에서도 단연 손에 꼽힐 만큼 이름이 높다.

 

 이런 사소한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성격이 아닌 레리는 그저 두 친구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큼만 말할 뿐이었다.

 

 “파는 거야?!”

 

 “나 살래!”

 

 “안 팔아……. 자주 먹어서 좋을 것 없고. 술이거든.”

 

 “에.”

 

 “에.”

 

 추위를 막아내는 또 다른 방법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레리가 뒤에 서 있던 집사에게 손짓했다. 기민하게 눈치챈 집사가 레리의 의자를 조심스레 빼 주었고, 레리의 구겨진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매만져 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르네와 레비가 잔을 들고 똑같은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사람의 눈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동그랗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 레리가 시비를 걸었다.

 

 “까망이, 르네 반만 닮아 봐.”

 

 “뭐! 왜 또 시비냐! 까망이는 뭔데?”

 

 “르네 옆에 있으니 한층 더 우중충해.”

 

 “맞아. 우중충해.”

 

 바락바락 성을 내는 검은 쪽 친구를 무시한 레리가 미안하다는 듯 미세하게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원래 같았으면 더 오래 얘기도 하고 그랬을 텐데…. 아직 오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야.”

 

 “아직도 많이 아파?”

 

 르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긴 식탁을 빙 돌아 쪼르르 다가왔다. 그 뒤를 따른 레비도 흠, 하며 레리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열은 내린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쉬어야겠다.”

 

 “그래, 나랑 레비는 신경 쓰지 말구.”

 

 친구들의 염려에 희미하게 웃은 레리가 다른 집사들에게 눈짓했다.

 

 “집안 어디든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놀아. 피곤해지면 저들 중 아무나 불러서 방에 데려다 달라고 해. 필요한 건 말하면 다 준비해줄 테니까.”

 

 “응응, 얼른 가서 쉬어.”

 

 “잘자!”

 

 “너희도 잘자. 오늘 와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상기된 얼굴이 유독 반짝반짝하다. 그러니까 사람 눈이 어떻게 저렇게 동그랗지? 그런 생각을 다시 하며 레리가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 * *

 

 

 방에 돌아온 레리는 간단히 옷을 갈아입었다. 시종을 모조리 물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은은한 광택이 심상치 않은 검은 책상 위로 새하얗고 매끄러운 종이가 팔랑팔랑 올라왔다. 덩굴과 꽃이 섬세하게 조각된 은제 펜촉에 잉크를 묻히고 쭉쭉 글을 썼다. 교황청으로 갈 것이었기에 몇 번이고 꼼꼼하게 글을 살폈다. 사제를 노엽게 할 표현은 없는지, 사상과 신앙을 의심받을 만한 표현은 없는지……. 마침내 완벽하게 다듬은 것을 제대로 된 편지지에 옮기기 위해 레리가 서랍을 열었다. 잘 분류해 둔 편지지를 뒤적거리던 레리가 작게 혀를 찼다. 도무지 마음에 차는 것이 없던 까닭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리가 두꺼운 커튼을 걷었다. 새까맣게 밤이 내려앉은 성도가 보였다. 성도 귀족의 성이 으레 그렇듯 가장 땅에서 멀고, 가장 하늘에 가까운 곳에 자리한 레리의 방은 아주 먼 구름바다까지 볼 수 있을 만큼 높았다. 레리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어둠이 드리운 성도 곳곳을 밝히는 가로등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 매서운 바람, 조금의 얼룩도 없는 유리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

 

 그러니까 그건 어떠한 예고도 전조도 없이 나타났다. 아주 익숙한 것을 가르고 불쑥 튀어나온 이방인, 먼 곳에서 찾아온 바람, 본 적 없는 것을 온몸에 칭칭 휘감고 나타난 불청객.

 

  레리는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본래의 의도를 잃어버린 머릿속에서 의문이 솟구치지 않음에 놀랄 겨를도 없이, 비스듬한 맞은 편에서 그녀의 오랜 친구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것도 염두에 두지 못한 채, 열이 물러간 지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은 몸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모르고서, 손에 든 초가 짜리몽땅해진 몸으로 간신히 불을 떠받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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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버스 기반

 

 

 

 레테는 오한에 떨다가 깨어났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메스껍고 역겹다는 것이었다.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고, 사지는 얼어붙은 것처럼 따가웠다. 귓가에 대고 북을 치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식은땀에 머리카락과 잠옷이 달라붙어 불쾌했으며 입안은 쓰고 시고 난리가 났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겨우 움직여 설렁줄을 당겼다. 이윽고 들어온 시종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섰다.

 

 “목욕.”

 

 “네, 주인님.”

 

 겨우 한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 욕지기가 솟아 레테는 한껏 얼굴을 찡그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역겨운데 막상 뭐 하나 뱉어내지 못해 끙끙거리며 앓고만 있었다.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속으로 중얼거린 레테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익숙한 얼굴의 시종 둘이 다가왔다. 유즈와 벨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테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 레테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몇 시지?”

 

 “오후 여덟 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됐어.”

 

 “차를 올리겠습니다.”

 

 적당히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레테가 좀 나아진 듯 인상을 폈다. 셰인이 크림 같은 거품을 조심스레 어깨에 얹었다. 편히 몸을 늘어뜨리고 눕자, 유즈가 부드럽게 뺨을 감쌌다. 적당한 체온에 녹은 크림과 오일이 부드럽게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두피와 머리카락, 온몸을 정성껏 마사지하며 시중을 드는 손길에 레테가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좀 낫네…….”

 

 주인의 기분이 나아진 것을 기민하게 파악한 유즈가 찻잔을 들었다. 목을 받쳐 편안히 찻물을 넘길 수 있게끔 도운 유즈가 입을 열었다.

 

 “두 친구분은 응접실에서 휴식 중이십니다.”

 

 “둘? 누구?”

 

 눈을 동그랗게 뜬 레테가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둘. 알았어. 식사는?”

 

 “준비해두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단장하는 시간에 맞추어 안내하겠습니다.”

 

 “좋아.”

 

 칭찬을 받은 유즈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숙였다. 그런 유즈를 레테의 눈을 피해 매섭게 노려본 셰인이 레테의 종아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나른하게 탄성을 뱉은 레테가 칭찬하듯 짧게 웃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진 주인의 총애를 얻고자 물밑에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남자를 본 벨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 자신들은 한낱 사용인이고,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무가치한 남자 1, 2, 3에 불과할 텐데.

 

 레테는 침실에 들인 남자를 결코 살려 보내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고, 하등의 가치를 두지 않았으며, 그 모든 것을 가볍게 덮을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슈가르드의 뱀이 뭘 삼켜도 무어라 항의할 자는 없었다. 그깟 평민 좀 죽었다고 정의롭게 검을 들 자가 과연 있겠는가.

 

 결국, 주인의 기분에 따라 오늘내일 헤아리는 인생이다. 이슈가르드 최하층의 삶이 나은지, 이슈가르드 귀족의 시종이 나은지는 알 수 없을 뿐이다…

 

 “벨.”

 

 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인의 시종을 들며 다른 생각을 하다가 장미수를 바닥에 콸콸 붓고 있었다. 새하얀 바닥 위에 붉은 물이 흥건했다.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 그깟 게 있었다면 이 성의 지하실은 아늑하고 향기로웠겠지. 유즈와 셰인이 정적을 하나 제거해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레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벨은 사형선고를 기다렸다.

 

 “심심하니?”

 

 그는 고개를 숙였다. 레테의 몸에 비단처럼 부드러운 가운을 걸쳐 준 셰인이 주인에게 속삭였다. 성심을 다해 모셔야 할 주인 앞에서 감히 건방을 떨다니요. 그 옆에서 레테의 손을 잡아 걸음을 보조하며 유즈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규율을 어지럽히는 천박한 것의 목을 잘라 본을 세워야 합니다.

 

 레테가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어가 욕실 안의 설렁줄을 당겼다. 세 번. 그 의미를 명확히 안 벨이 손을 덜덜 떨며 주저앉았고, 레테의 곁에 붙어 선 두 남자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주인님.”

 

 레테의 모든 문제를 앞장서 처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레테는 마치 오늘의 날씨를 평가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 다 치워.”

 

 “예.”

 

 “주, 주인님.”

 

 “주인님!”

 

 그들이 간과한 것이라면 첫째로 레테의 성정이 너그럽지 않다는 것, 둘째로 레테의 기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셋째로 레테의 지하실은 언제나 새로운 자의 입장을 환영한다는 것, 넷째로 레테는 친구들이 쉬고 있는 이 집에서 건방을 떤 천것들을 용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 집이 천것들의 놀이터가 되었지?”

 

 “관리를 엄중히 하지 못한 저희의 탓입니다.”

 

 “됐어, 나 배고파.”

 

 “곧 모시겠습니다.”

 

 “옷.”

 

 “준비해두었습니다.”

 

 끌려나가는 세 남자의 입이 거칠게 틀어막혔다. 여섯 장정이 우악스레 그들을 끌고 저택의 은밀한 통로로 이어진 문을 열고 사라졌다.

 

 레테는 한결 나아진 몸에 기지개를 켰다. 거칠게 뛰는 심장은 여전히 불쾌했으나, 연구를 위해 진한 차를 연거푸 들이켠 때와 비슷하다고 여기니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레테의 곁을 스무 해가 넘도록 지킨 집사가 익숙한 손길로 옷 시중을 들었다.

 

 그는 본분을 지킬 줄 알았다. 그것은 곧 그의 목숨을 연명하는 방법과 직결되었고, 변덕스럽고 비정한 주인의 총애를 움켜쥘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 입안의 혀처럼 굴 것, 변화무쌍한 기분에 언제나 납작 엎드릴 것. 레테는 개처럼 엎드려 복종하는 충신에게 언제나 자비를 베풀었으므로.

 

 그녀의 곁에서 건방을 떨다 목을 떨군 이들이 커르다스에 흩날리는 눈송이만큼 많았다. 그런 그들의 목숨을 손수 거두기도 하며 얼마나 기뻐했던가?

 

 다만 안타까운 것은 주인의 몸에 생긴 이름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레테가 장갑을 끼며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안내하라는 뜻임을 알아챈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테의 곁에 서서 에스코트했다.

 

 “둘은?”

 

 “미리 모셨습니다.”

 

 “좋아.”

 

 “침실은 어찌 안내해드릴까요?”

 

 “삼층. 둘 다.”

 

 “알겠습니다.”

 

 “아, 르네는 왼쪽이야. 레비는 오른쪽.”

 

 “예.”

 

 레테의 설명은 언제나처럼 불친절했으나 그는 무리 없이 알아들었다. 거대한 문을 열자 먼저 앉아서 기다리던 르네와 레비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르네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추운 건 어때? 괜찮아. 열은? 내렸어. 기침은 안 나? 응. 그 옆으로 레비가 달려왔다. 속은 괜찮아? 네 얼굴 보니 안 괜찮아. 말 다 했냐.

 

 그는 조용히 의자를 빼 주고 퇴장했다. 이윽고 긴장을 익숙하게 감춘 시종들이 전채요리를 내왔다. 새것처럼 반짝이는 은제 나이프에 시종의 얼굴이 얼핏 비쳤다. 무심하게 시종의 뺨 위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레테의 시선에 그가 짧은 기대감을 품었다.

 

 무소불위의 주인이 어쩌면 자신을 품고 총애해주지 않을까, 스무 해 동안 두텁게 쌓아 온 권력을 숨 쉬듯 휘두르는 그 집사처럼 어쩌면 자신도, 어쩌면.

 

 그 천박한 기대감을 꿰뚫어 본 레테가 피식 웃었다. 레테가 잔을 가볍게 들었다.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손목을 움직이는 모양새는 분명 예의에 어긋난 것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그 태도를 탓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테가 입을 열었다.

 

 “다른 잔으로.”

 

 레테의 곁에 선 시종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자기들끼리 도란도란 떠들던 르네와 레비의 시선을 교묘히 피한 집사가 그 시종을 데리고 나갔다. 지하실의 세 시종과 합류하겠지. 짝도 맞겠다, 사이 좋게 놀던가. 새로운 잔을 들고 온 시종이 레몬수를 따랐다. 깔끔하게 입가심을 한 레테가 포크를 들었다.

 

 해롭지 않은 것, 깨끗한 것, 친절한 것. 아무렇지 않게 포장한 레테가 능숙하게 두 친구의 대화에 참여했다.

 

 레비 너 머리는 감았니? 너는 왜 시비냐? 키가 작아서 윗공기에 눌린 거구나, 미안. 너는 진짜 악마야. 나는 레리 말이 맞는 것 같아. 너도 악마야. 내 천사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니? 그래, 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너희 인성은 썩은 물 푸길이야.

 

  정말 친절하시군. 레테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용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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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버스 기반

 

 

 

 쏟아지는 새하얀 눈을 바른 것처럼 새하얗고 차가운 바닥을 밟을 때면, 메아리치듯 울리는 구두 소리가 여기 사람이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 같아 더 조심스러워지곤 했다. 비와 눈, 우박을 가리지 않고 하루가 멀게 쏟아지는 곳에서는 값비싼 융단이 그저 걸레와 다를 바 없어 웅장한 저택은 얼굴이 비칠 만큼 반들거리는 모습 그대로의 바닥을 자랑했다. 굳이 쓸모없는 성의 바닥 얘기로 한참을 떠든 이유는, 이 소름 끼칠 만큼 결벽적인 흰색이 내 친구의 하얀 낯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아니지, 그 애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 집이 존재했을 테니 아마도 그 애 낯빛이 이걸 닮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레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집안을 장식하는 은 촛대와 초상화를 훑어보았다. 성내는 아주 적막했다. 숨소리마저 천둥처럼 크게 울리는 곳은 언제나 적응하기 힘든 법이라, 레비는 몇 년 만에 찾은 친구를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기다렸다.

 

 여긴 꼭 유령이 나올 것 같아. 예전에 함께 방문했던 르네가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레테는 그 말에 뜻 모를 시선을 한 번 주었을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눈빛을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르네가 아차 싶었는지 절대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었다며 횡설수설했지만, 레테는 그저 “알아.” 한 마디로 르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 가시가 돋친 사람들의 말, 외지인을 향한 경계와 적대, 모험가를 향한 질 낮은 수군거림과 소수종족을 향한 근거 없는 선동과 날조. 굳이 표현한다면 극히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이슈가르드의 차별주의자들. 귀족과 부자가 동의어가 된 이 시대에 굳이 백작이니 자작이니 하는 관을 쓰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란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고―레테도 작위를 받은 집안의 금지옥엽이긴 하지만, 아무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친구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외치며 르네와 고개를 연신 끄덕였지―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굳이 이 얼어붙은 도시에 발을 디딘 것은 단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서였다.

 

 레테가 네이머(NAMER)로 발현했다.

 

 워낙 몸이 약해서 발현 증상만으로도 사경을 헤맸다고 한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오한이 들어 집안이 난리가 났다던가? 레테의 충직한 집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급히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을 때, 르네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몸에 좋다는 약을 바리바리 챙겼고 레비는 본인과 르네의 옷가지를 쑤셔 넣다시피 챙겨 들었다. 국경을 넘고 비밀스러운 지름길을 통해 오는 그 과정은 어떤 정신으로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르네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이었고, 레비 본인도 표정관리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렴 친구가 죽어간다는데 제정신일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레비는 계단을 내려오는 르네의 모습에 잠에서 깨어나듯 귀를 퍼득 떨었다. 추운 성내에서도 더웠는지 소매를 걷은 채 터덜터덜 내려오는 르네의 꼬리가 펑 터져있었다.

 

 “큰 고비는 넘겼는데…….”

 

 “넘겼는데…?”

 

 레비는 침을 삼켰다. 넘겼으면 넘긴 건데 왜 끝을 흐리냐는 질문이다. 르네가 긴 꼬리를 손가락으로 뱅뱅 돌렸다. 천년 같은 찰나가 지나가고, 레비가 긴장으로 바싹 속이 탈 때쯤에야 르네가 말을 이었다.

 

 “레리가 안 일어나.”

 

 “어?”

 

 “안 일어난다구!”

 

 “왜!”

 

 르네와 레비의 설전이 오갔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삐죽 서 있던 신경이 갑작스럽게 진정된 부작용 탓이었다. 왜 안 일어나느냐,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정말 고비를 넘긴 것은 맞느냐, 날 의심하다니 너부터 이승의 문을 넘기고 싶냐, 푸길같은 게 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위태로웠던 순간이 지나자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이 유치하게 싸우던 것을 멈춘 것은 레테의 전속 시종이 한껏 불안한 표정으로 달려 나왔을 때였다.

 

 “주인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요컨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 도와서 깨워줄 것 아니면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정중하고 가녀린 부탁이었다.

 

 잠깐 이성을 버렸으나 양심마저 버리지 않았던 둘은 빠르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안절부절 작은 소란을 피우던 그들을 안내한 것은 집사장이었다.

 

 레리가 갓 태어났을 때는 유모 노릇도 했다던데.

 

 르네는 집사장의 뒤를 따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르네가 아는 유모의 모습은 푸근하거나, 다정하거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굳이 친절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돌보는 아기를 향해서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나?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해도 온 세상의 작고 어리고 연약한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나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가지는 것이 옳은 법이었다. 그러나 레테의 입으로 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면, 그래, 저 사람은 영 아니었다. 르네는 입술을 삐죽였다. 정 한 톨 안 주면서 유모는 무슨 얼어 죽을 유모.

 

 유모, 집사, 충직한 종. 누가 봐도 그렇게 생기기는 했다. 실제로 뼛속까지 충정을 바치는 모습은 혀를 내두를 만큼 맹목적이었으니까. 칼같이 주름이 잡힌 옷, 불빛을 매끄럽게 반사하는 구두, 새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은시계와 정갈한 흰 장갑. 세월을 드러내는 주름마저 열 맞추어 얼굴에 자리한 것처럼 단단하고 엄격한 인상의 집사는 뒤늦게서야 그들에게 응접실을 내주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이리 호되게 앓는 것은 너무 오래간만인지라 경황이 없어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리 말하며 꼿꼿했던 몸을 직각으로 숙이는데, 레비와 르네는 불편한 마음에 되었으니 어서 레테를 돌보아달라 부탁하며 응접실 밖으로 내보냈다. 따뜻한 불꽃이 넘실거리는 벽난로를 비롯해 곳곳에서 타오르는 촛불, 두꺼운 장막과 특수한 직조 기법으로 짠 태피스트리가 추위를 완벽하게 차단해주었다.

 

 밖과 달리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에 두 사람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아픈 친구도 순조롭게 회복 중이고, 우려했던 일은 없었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방은 호화롭고 평온했다.

 

 “저거 진짜 금이겠지?”

 

 “여기서 가짜인 건 없을걸.”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 가짜겠지.”

 

 “하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툭 내뱉은 르네가 폭신한 쿠션을 끌어안았다. 여기는 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 소파를 팡팡 때리는 꼬리를 따라 눈을 굴리던 레비가 팔걸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레리는 왜 여기로 돌아온 걸까?”

 

 “몰라. 속상해.”

 

 “나도 속상해.”

 

 르네는 숨을 몰아쉬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원체 정이 많은 사람이다. 다정하다 못해 무른 면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레테는 자주 아팠다. 애초에 초목이 우거진 따뜻한 나라에 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솜털이 보송한 귓가에 속삭이던 정령들이 가여워하며 속삭이던 것을 기억했다. 저 애는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아주 연약한 숨을 뱉다가 아침 햇살에 흩어지는 서리처럼 사그라들겠지……. 어린 마음에 놀라 딸꾹질을 하다가 약초를 꺾어 들고 달려갔다. 다짜고짜 아프지 말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철부지를 보던 그 애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레테에게 르네가 보드라운 비단처럼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듯, 르네에게 레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친한 친구를 떠나서 그랬다. 동정이라고 싫어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좀 더 애틋하고 말랑한 것이었다. 레테는 르네에게 자주 웃었다. 단 한 번도 시험에 들게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르네도 마주 웃었다. 단 한 번도 시험하려 들지 않았고,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가 그랬다. 정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풀을 밟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으며, 한참 집중해 펜을 잡고 있다가도 발랄한 노크 소리에 책을 덮으며 서로를 마주했다.

 

 그런 친구인데, 나도 레비도 한 번도 차갑게 굴어본 적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르네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여긴 기분 나쁜 곳이야. 레리 몸에도 나쁘고, 마음에도 나쁘고, 아무튼 다 나빠. 네가 방에 안 들어오고 밖에서 기다리길 잘했지. 레리 몸이 그렇게 불덩이 같은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야. 혼비백산해서 들어갔는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그렇게 있으니까 차분해지는 거 있지. 길거리의 동물이 아파서 쓰러져 있다 해도 그렇게 냉정하게 굴진 못 할 거야. 아니지, 그들은 냉정하기도 하지만 무심하다는 것에 더 가까웠어. 어쩜 그래? 사람이 그렇게 아파하는데.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열에 들떠서 힘겨워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 길가의 돌멩이 스쳐 보는 듯한 그 눈빛이라니.”

 

 조용히 쏟아내는 말에 레비가 귀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잘해야지. 어차피 이미 늦어버렸어. 저 사람들은 영원히 얼어붙은 채로 살겠지. 그래도 나는 레리랑 친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이 성에서 레리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선한 이는 타인을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받고 자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숨을 쉬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자라고 믿으면서 다정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르네와 레비는 그런 면에서 선한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악랄하고 냉정한 것이 이 저택의 작은 주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집사장 쯤이야 발끝으로 부리고 시종은 눈빛 하나로 꺾어버리는 것이 그들의 친구인 줄도 모르고.

 

 “얼른 레리가 일어났으면 좋겠어.”

 

 “나두.”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한껏 긴장한 채 정신없이 보낸 반나절의 피로가 한꺼번에 그들을 덮쳐왔다. 아늑하고 따스한 응접실에서, 각자 길고 푹신한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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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ette

The Sweetest Thing In The World.


 비유하자면 설탕 같은 것이다. 달고, 쉽게 녹아내려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끈끈하게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는 것. 거미처럼 실을 자아내 한데 뭉쳐 놓으면 폭신한 것이 구름 비슷하게 얽혀 한없이 다디단 것이다. 한껏 졸여 사방에 단내를 풍기는 캐러멜, 막 포장을 벗긴 초콜릿, 색색이 회오리치며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막대사탕, 윤기가 반지르르 흘러 침이 고이게 만드는 과일 절임, 온 세상의 달콤한 것들이 꼭 여기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비슷한 것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다가 문득 바라보면, 흰 낯에 두 뺨만 뽀얀 것이 꼭 새하얀 복숭아에 보들보들 덧칠한 분홍색이, 얘는 참 예쁘게도 생겼다, 하는 것이다. 사람 옆에 가져다 붙인 것이 온갖 단맛 나는 먹거리라 말린 꽃잎에 물을 부어 혀에 덧칠하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꼭 얘가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과 비슷해서 그냥 또 단 것을 떠올리고 만다.

 

 비슷한 것이 옹기종기 모여 앉는 편이 더 좋을 텐데, 비슷하게 단내 나는 분홍색 뭐 그런 것들 양손 가득 쥐고서 웃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뭐가 그리 재밌다고 여기에 털썩 주저앉아 자리를 지키니? 괜히 물었다가, 그럼 나 그냥 갈까? 라는 말이 돌아올 것 같아서 그냥 찻잔만 들어 시선을 떨굴 뿐이다.

 

 말하자면 구름 같은 것이다. 얼핏 스치면 저 멀리서 몽실몽실하게 뭉쳐 떠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날 다시 바라보면 분홍색이다가, 또 다른 날 다시 바라보면 흰색이다가, 먼 훗날 다시 바라보면 내 근처에서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는 부드럽고 가벼운 그런 것.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니? 라고 물어보면,

 

 네가 바라봐 줄 때까지 기다렸지, 라고 답하는 것.

 

 그러니까 말하자면 말랑한 뺨을 가진 작고 무해한 것.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는, 작은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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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Right, Cute Little Man.

 

엄살은!

 


헤리.

 

떠난 지 일주일도 안 지났어. 안 쓰던 공대는 왜 쓰고 그러니?

생각 많이 해. 매일.

그러니 청승 그만 떨고 건강히 지내.

 

쿠가네에서, 레리.


사랑하는 레리.

 

그러면 더 절절하게 전해질 것 같아서요. 저는 음유시인처럼 애달프게 말을 지어내는 방법은 몰라요. 그러니 이렇게 얕은수라도 써야 조금이나마 당신에게 전해지지 않겠어요?

그나저나 레리, 열 줄이라도 채워 주세요, 심장이 닳아서 곧 죽을 것 같아요.

제가 매일매일 울면서 당신 편지를 끌어안고 자는 건 알고 있어요?

왜 그렇게 무정해요? 어떻게 고작 세 줄이 끝이에요!

 

애타는 기다림을 담아, 헤리.


사랑하는 헤리.

 

내년에 만날까?

 

커르다스에서, 레리.


나의 영원한 빛, 내 사랑, 가을과 겨울의 종착역, 무심한 나의 연인 레리.

 

너무해요. 여우 같은 남편을 두고 대체 어딜 그렇게 다니고 있어요?

절절한 제 마음이 조금도 닿지 않았나요? 어제도 그저께도, 일주일 전에도 매일 베갯잇을 혼자 적시는 제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아침이면 눈이 부어서 한층 더 울적해진 마음을 안고 혼자 식사를 하고, 당신이 없어 쓸쓸해진 서재에 콕 박혀서 책이나 넘겨 보고 있는 제가 안타깝지도 않아요?

내년에 만나자구요? 나를 말려 죽일 셈인가요, 내 사랑?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하는 헤리가.


철부지에게.

 

내일 저녁 맛있는 걸로 준비해.

 

한숨과 함께, 레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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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etter Walking In Autumn  2019. 6. 13. 20:58

A Letter Walking In Autumn

Think of me, Please, at least a little bit.

 

 

 

레리.

 

 단풍이 천천히 가지를 덮고 피어나는 계절입니다. 초목이 우거졌던 저 먼 곳의 산허리가 곱게 물들어 마치 노을을 뿌린 것 같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생각이 나 펜을 잡았습니다. 당신의 손끝이 스치고 지나갔던 몇 해 전의 나뭇잎이 글씨를 가리고 있음을 알아챈 순간 문득 서러워졌습니다. 당신에게는 별 의미 없는 변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네 생각 나서 주워 왔어, 어제 이 색으로 눈가를 칠했지.

 

 라고 말하며 건네주는 흔하고 평범한 단풍잎 한 장. 험한 날붙이만 잡아 온 손에 이 작은 것이 바스러질까 덜컥 겁을 먹어 바라만 보고 있으려니, 당신은 서재에서 책을 한 권 들어 무심한 손길로 갈피를 장식해 주었지요. 그래요, 그랬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가 한 겹 어두워지고 다시 빛을 찾을 즘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지나쳐 온 시간 틈으로 제 손을 잡아 이끄는 것 같습니다.

 

 드높은 하늘 위에 바람 한 점 없는 계절이건만, 비 한 방울 없는 계절이건만. 저는 차고 쓸쓸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뒤척이는 몸짓에 놀라 달아난 꿈 한자락이 당신을 괴롭게 만들진 않았는지요? 여전히 비스듬히 기대앉아 시중드는 이의 손길을 무심한 낯으로 받고 있나요? 어설픈 손길로 매만졌던 머리카락이 아직 희미한 산홋빛으로 남아 있습니까? 저는 여전히 당신을 잊지 못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그리움을 담아 닿을 곳 없는 편지를 씁니다.

 

 처음 마주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눈길이 제 어깨를 무심하게 스쳐 갈 때면 온 세상이 떠나가라 악을 쓰고 싶기도 했습니다. 저 여기 있어요, 나를 향해 눈을 맞춰 주세요, 그렇게요. 그렇지만 제가 그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제가. 당신의 시선이 제가 아닌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이 사무치게 서러워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만, 결국 그 마음 또한 당신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길었지요, 어쩌면 짧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오랜 기다림과 당신의 짧은 애도 끝에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지요. 기억하십니까? 당신은 거울에 비친 제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 속에 겁먹은 저를 발견하고, 작고 하얀 손이 과거의 미련을 망설임 없이 끊어냈습니다. 그 순간의 감정은 여전히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듭니다. 당신은 어떤 마음이었나요? 그 순간이 부디 당신에게도 유의미한 것으로 남아 있길 바랍니다. 유의미한, 아주 아름다운, 어쩌면 당신에겐 비극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약속 같은 것으로요.

 

 생각해 보면 비극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당신은 때로 너무할 정도로 솔직하니까요. 감출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하얀 낯에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띄우곤 하죠. 누군가 당신을 원망하든, 지지하든, 신뢰하든, 불신하든, 그 어떤 평가조차도 길바닥의 자갈만큼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정말로 싫었다면, 절 바라볼 생각조차 없었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저 그렇게 살았겠죠. 평행선을 걸어가면서, 제 존재조차 모른 채 그렇게. 그러나 당신은 절 바라보았고, 제 시선에 답해주었고, 당신을 부르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고, 손을 내밀면 그 위로 당신의 손가락을 건네주었고, 웃으면, 사랑에 푹 빠진 얼간이가 웃으면, 당신도 그 흔적을 따라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제 이름을 불러주었지요.

 

 평안하십니까? 이제는 아프지 않은가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당신의 기나긴 괴로움이 이제는 그댈 평안케 만들었나요? 쉼 없이 흐르는 계절과, 스치는 바람과, 당신의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은 낮과 밤의 색채와, 고운 발 아래를 지나가는 흙과 잔디와 대리석의 감촉과, 부드러운 입술과 혀를 넘어가는 물과 음식이, 당신을 살아 숨쉬게 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앞에서…….

 

 아주 조금쯤, 희미하게라도, 작은 흔적이라도 좋아요. 제 생각을 하셨나요? 제가 떠오르진 않았던가요? 반짝이는 백사장을 바라보며 저와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당신의 시선을 한 줌 잡아채려 애쓰는 새들의 날갯짓에 제 시선을 떠올렸던 적이 있었나요?

 

 그랬으면 좋았을 거예요. 아주 행복할 거예요. 당신의 시간을 날 위해 허비해주었다면, 단 삼 초의 시간이라도 나를 위해 할애해 주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 찰나를 위해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아주 오랜 시간 그 행복을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그 행복을 위해 다시 십 년을 웃고, 당신의 손을 잡고, 그 귓가에 속삭이면서, 발자국을 따라 긴 그림자를 드리워 당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면서…….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정말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부디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생각해 주세요. 당신의 삶에 저를 위한 자리를 내어 주세요. 당신의 웃음 한 번에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멍청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 주세요.

 

 평안하세요. 건강히 돌아오세요. 저는 언제나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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