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tter Walking In Autumn
레리.
단풍이 천천히 가지를 덮고 피어나는 계절입니다. 초목이 우거졌던 저 먼 곳의 산허리가 곱게 물들어 마치 노을을 뿌린 것 같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생각이 나 펜을 잡았습니다. 당신의 손끝이 스치고 지나갔던 몇 해 전의 나뭇잎이 글씨를 가리고 있음을 알아챈 순간 문득 서러워졌습니다. 당신에게는 별 의미 없는 변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네 생각 나서 주워 왔어, 어제 이 색으로 눈가를 칠했지.
라고 말하며 건네주는 흔하고 평범한 단풍잎 한 장. 험한 날붙이만 잡아 온 손에 이 작은 것이 바스러질까 덜컥 겁을 먹어 바라만 보고 있으려니, 당신은 서재에서 책을 한 권 들어 무심한 손길로 갈피를 장식해 주었지요. 그래요, 그랬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가 한 겹 어두워지고 다시 빛을 찾을 즘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지나쳐 온 시간 틈으로 제 손을 잡아 이끄는 것 같습니다.
드높은 하늘 위에 바람 한 점 없는 계절이건만, 비 한 방울 없는 계절이건만. 저는 차고 쓸쓸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뒤척이는 몸짓에 놀라 달아난 꿈 한자락이 당신을 괴롭게 만들진 않았는지요? 여전히 비스듬히 기대앉아 시중드는 이의 손길을 무심한 낯으로 받고 있나요? 어설픈 손길로 매만졌던 머리카락이 아직 희미한 산홋빛으로 남아 있습니까? 저는 여전히 당신을 잊지 못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그리움을 담아 닿을 곳 없는 편지를 씁니다.
처음 마주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눈길이 제 어깨를 무심하게 스쳐 갈 때면 온 세상이 떠나가라 악을 쓰고 싶기도 했습니다. 저 여기 있어요, 나를 향해 눈을 맞춰 주세요, 그렇게요. 그렇지만 제가 그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제가. 당신의 시선이 제가 아닌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이 사무치게 서러워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만, 결국 그 마음 또한 당신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길었지요, 어쩌면 짧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오랜 기다림과 당신의 짧은 애도 끝에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지요. 기억하십니까? 당신은 거울에 비친 제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 속에 겁먹은 저를 발견하고, 작고 하얀 손이 과거의 미련을 망설임 없이 끊어냈습니다. 그 순간의 감정은 여전히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듭니다. 당신은 어떤 마음이었나요? 그 순간이 부디 당신에게도 유의미한 것으로 남아 있길 바랍니다. 유의미한, 아주 아름다운, 어쩌면 당신에겐 비극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약속 같은 것으로요.
생각해 보면 비극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당신은 때로 너무할 정도로 솔직하니까요. 감출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하얀 낯에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띄우곤 하죠. 누군가 당신을 원망하든, 지지하든, 신뢰하든, 불신하든, 그 어떤 평가조차도 길바닥의 자갈만큼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정말로 싫었다면, 절 바라볼 생각조차 없었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저 그렇게 살았겠죠. 평행선을 걸어가면서, 제 존재조차 모른 채 그렇게. 그러나 당신은 절 바라보았고, 제 시선에 답해주었고, 당신을 부르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고, 손을 내밀면 그 위로 당신의 손가락을 건네주었고, 웃으면, 사랑에 푹 빠진 얼간이가 웃으면, 당신도 그 흔적을 따라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제 이름을 불러주었지요.
평안하십니까? 이제는 아프지 않은가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당신의 기나긴 괴로움이 이제는 그댈 평안케 만들었나요? 쉼 없이 흐르는 계절과, 스치는 바람과, 당신의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은 낮과 밤의 색채와, 고운 발 아래를 지나가는 흙과 잔디와 대리석의 감촉과, 부드러운 입술과 혀를 넘어가는 물과 음식이, 당신을 살아 숨쉬게 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앞에서…….
아주 조금쯤, 희미하게라도, 작은 흔적이라도 좋아요. 제 생각을 하셨나요? 제가 떠오르진 않았던가요? 반짝이는 백사장을 바라보며 저와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당신의 시선을 한 줌 잡아채려 애쓰는 새들의 날갯짓에 제 시선을 떠올렸던 적이 있었나요?
그랬으면 좋았을 거예요. 아주 행복할 거예요. 당신의 시간을 날 위해 허비해주었다면, 단 삼 초의 시간이라도 나를 위해 할애해 주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 찰나를 위해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아주 오랜 시간 그 행복을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그 행복을 위해 다시 십 년을 웃고, 당신의 손을 잡고, 그 귓가에 속삭이면서, 발자국을 따라 긴 그림자를 드리워 당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면서…….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정말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부디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생각해 주세요. 당신의 삶에 저를 위한 자리를 내어 주세요. 당신의 웃음 한 번에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멍청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 주세요.
평안하세요. 건강히 돌아오세요. 저는 언제나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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