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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your name? (1)  2019. 9. 7. 14:59

*네임버스 기반

 

 

 

 쏟아지는 새하얀 눈을 바른 것처럼 새하얗고 차가운 바닥을 밟을 때면, 메아리치듯 울리는 구두 소리가 여기 사람이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 같아 더 조심스러워지곤 했다. 비와 눈, 우박을 가리지 않고 하루가 멀게 쏟아지는 곳에서는 값비싼 융단이 그저 걸레와 다를 바 없어 웅장한 저택은 얼굴이 비칠 만큼 반들거리는 모습 그대로의 바닥을 자랑했다. 굳이 쓸모없는 성의 바닥 얘기로 한참을 떠든 이유는, 이 소름 끼칠 만큼 결벽적인 흰색이 내 친구의 하얀 낯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아니지, 그 애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 집이 존재했을 테니 아마도 그 애 낯빛이 이걸 닮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레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집안을 장식하는 은 촛대와 초상화를 훑어보았다. 성내는 아주 적막했다. 숨소리마저 천둥처럼 크게 울리는 곳은 언제나 적응하기 힘든 법이라, 레비는 몇 년 만에 찾은 친구를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기다렸다.

 

 여긴 꼭 유령이 나올 것 같아. 예전에 함께 방문했던 르네가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레테는 그 말에 뜻 모를 시선을 한 번 주었을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눈빛을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르네가 아차 싶었는지 절대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었다며 횡설수설했지만, 레테는 그저 “알아.” 한 마디로 르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 가시가 돋친 사람들의 말, 외지인을 향한 경계와 적대, 모험가를 향한 질 낮은 수군거림과 소수종족을 향한 근거 없는 선동과 날조. 굳이 표현한다면 극히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이슈가르드의 차별주의자들. 귀족과 부자가 동의어가 된 이 시대에 굳이 백작이니 자작이니 하는 관을 쓰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란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고―레테도 작위를 받은 집안의 금지옥엽이긴 하지만, 아무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친구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외치며 르네와 고개를 연신 끄덕였지―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굳이 이 얼어붙은 도시에 발을 디딘 것은 단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서였다.

 

 레테가 네이머(NAMER)로 발현했다.

 

 워낙 몸이 약해서 발현 증상만으로도 사경을 헤맸다고 한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오한이 들어 집안이 난리가 났다던가? 레테의 충직한 집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급히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을 때, 르네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몸에 좋다는 약을 바리바리 챙겼고 레비는 본인과 르네의 옷가지를 쑤셔 넣다시피 챙겨 들었다. 국경을 넘고 비밀스러운 지름길을 통해 오는 그 과정은 어떤 정신으로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르네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이었고, 레비 본인도 표정관리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렴 친구가 죽어간다는데 제정신일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레비는 계단을 내려오는 르네의 모습에 잠에서 깨어나듯 귀를 퍼득 떨었다. 추운 성내에서도 더웠는지 소매를 걷은 채 터덜터덜 내려오는 르네의 꼬리가 펑 터져있었다.

 

 “큰 고비는 넘겼는데…….”

 

 “넘겼는데…?”

 

 레비는 침을 삼켰다. 넘겼으면 넘긴 건데 왜 끝을 흐리냐는 질문이다. 르네가 긴 꼬리를 손가락으로 뱅뱅 돌렸다. 천년 같은 찰나가 지나가고, 레비가 긴장으로 바싹 속이 탈 때쯤에야 르네가 말을 이었다.

 

 “레리가 안 일어나.”

 

 “어?”

 

 “안 일어난다구!”

 

 “왜!”

 

 르네와 레비의 설전이 오갔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삐죽 서 있던 신경이 갑작스럽게 진정된 부작용 탓이었다. 왜 안 일어나느냐,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정말 고비를 넘긴 것은 맞느냐, 날 의심하다니 너부터 이승의 문을 넘기고 싶냐, 푸길같은 게 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위태로웠던 순간이 지나자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이 유치하게 싸우던 것을 멈춘 것은 레테의 전속 시종이 한껏 불안한 표정으로 달려 나왔을 때였다.

 

 “주인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요컨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 도와서 깨워줄 것 아니면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정중하고 가녀린 부탁이었다.

 

 잠깐 이성을 버렸으나 양심마저 버리지 않았던 둘은 빠르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안절부절 작은 소란을 피우던 그들을 안내한 것은 집사장이었다.

 

 레리가 갓 태어났을 때는 유모 노릇도 했다던데.

 

 르네는 집사장의 뒤를 따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르네가 아는 유모의 모습은 푸근하거나, 다정하거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굳이 친절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돌보는 아기를 향해서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나?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해도 온 세상의 작고 어리고 연약한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나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가지는 것이 옳은 법이었다. 그러나 레테의 입으로 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면, 그래, 저 사람은 영 아니었다. 르네는 입술을 삐죽였다. 정 한 톨 안 주면서 유모는 무슨 얼어 죽을 유모.

 

 유모, 집사, 충직한 종. 누가 봐도 그렇게 생기기는 했다. 실제로 뼛속까지 충정을 바치는 모습은 혀를 내두를 만큼 맹목적이었으니까. 칼같이 주름이 잡힌 옷, 불빛을 매끄럽게 반사하는 구두, 새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은시계와 정갈한 흰 장갑. 세월을 드러내는 주름마저 열 맞추어 얼굴에 자리한 것처럼 단단하고 엄격한 인상의 집사는 뒤늦게서야 그들에게 응접실을 내주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이리 호되게 앓는 것은 너무 오래간만인지라 경황이 없어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리 말하며 꼿꼿했던 몸을 직각으로 숙이는데, 레비와 르네는 불편한 마음에 되었으니 어서 레테를 돌보아달라 부탁하며 응접실 밖으로 내보냈다. 따뜻한 불꽃이 넘실거리는 벽난로를 비롯해 곳곳에서 타오르는 촛불, 두꺼운 장막과 특수한 직조 기법으로 짠 태피스트리가 추위를 완벽하게 차단해주었다.

 

 밖과 달리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에 두 사람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아픈 친구도 순조롭게 회복 중이고, 우려했던 일은 없었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방은 호화롭고 평온했다.

 

 “저거 진짜 금이겠지?”

 

 “여기서 가짜인 건 없을걸.”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 가짜겠지.”

 

 “하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툭 내뱉은 르네가 폭신한 쿠션을 끌어안았다. 여기는 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 소파를 팡팡 때리는 꼬리를 따라 눈을 굴리던 레비가 팔걸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레리는 왜 여기로 돌아온 걸까?”

 

 “몰라. 속상해.”

 

 “나도 속상해.”

 

 르네는 숨을 몰아쉬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원체 정이 많은 사람이다. 다정하다 못해 무른 면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레테는 자주 아팠다. 애초에 초목이 우거진 따뜻한 나라에 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솜털이 보송한 귓가에 속삭이던 정령들이 가여워하며 속삭이던 것을 기억했다. 저 애는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아주 연약한 숨을 뱉다가 아침 햇살에 흩어지는 서리처럼 사그라들겠지……. 어린 마음에 놀라 딸꾹질을 하다가 약초를 꺾어 들고 달려갔다. 다짜고짜 아프지 말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철부지를 보던 그 애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레테에게 르네가 보드라운 비단처럼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듯, 르네에게 레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친한 친구를 떠나서 그랬다. 동정이라고 싫어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좀 더 애틋하고 말랑한 것이었다. 레테는 르네에게 자주 웃었다. 단 한 번도 시험에 들게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르네도 마주 웃었다. 단 한 번도 시험하려 들지 않았고,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가 그랬다. 정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풀을 밟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으며, 한참 집중해 펜을 잡고 있다가도 발랄한 노크 소리에 책을 덮으며 서로를 마주했다.

 

 그런 친구인데, 나도 레비도 한 번도 차갑게 굴어본 적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르네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여긴 기분 나쁜 곳이야. 레리 몸에도 나쁘고, 마음에도 나쁘고, 아무튼 다 나빠. 네가 방에 안 들어오고 밖에서 기다리길 잘했지. 레리 몸이 그렇게 불덩이 같은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야. 혼비백산해서 들어갔는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그렇게 있으니까 차분해지는 거 있지. 길거리의 동물이 아파서 쓰러져 있다 해도 그렇게 냉정하게 굴진 못 할 거야. 아니지, 그들은 냉정하기도 하지만 무심하다는 것에 더 가까웠어. 어쩜 그래? 사람이 그렇게 아파하는데.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열에 들떠서 힘겨워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 길가의 돌멩이 스쳐 보는 듯한 그 눈빛이라니.”

 

 조용히 쏟아내는 말에 레비가 귀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잘해야지. 어차피 이미 늦어버렸어. 저 사람들은 영원히 얼어붙은 채로 살겠지. 그래도 나는 레리랑 친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이 성에서 레리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선한 이는 타인을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받고 자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숨을 쉬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자라고 믿으면서 다정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르네와 레비는 그런 면에서 선한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악랄하고 냉정한 것이 이 저택의 작은 주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집사장 쯤이야 발끝으로 부리고 시종은 눈빛 하나로 꺾어버리는 것이 그들의 친구인 줄도 모르고.

 

 “얼른 레리가 일어났으면 좋겠어.”

 

 “나두.”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한껏 긴장한 채 정신없이 보낸 반나절의 피로가 한꺼번에 그들을 덮쳐왔다. 아늑하고 따스한 응접실에서, 각자 길고 푹신한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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