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임버스 기반
레테는 오한에 떨다가 깨어났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메스껍고 역겹다는 것이었다.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고, 사지는 얼어붙은 것처럼 따가웠다. 귓가에 대고 북을 치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식은땀에 머리카락과 잠옷이 달라붙어 불쾌했으며 입안은 쓰고 시고 난리가 났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겨우 움직여 설렁줄을 당겼다. 이윽고 들어온 시종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섰다.
“목욕.”
“네, 주인님.”
겨우 한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 욕지기가 솟아 레테는 한껏 얼굴을 찡그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역겨운데 막상 뭐 하나 뱉어내지 못해 끙끙거리며 앓고만 있었다.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속으로 중얼거린 레테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익숙한 얼굴의 시종 둘이 다가왔다. 유즈와 벨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테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 레테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몇 시지?”
“오후 여덟 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됐어.”
“차를 올리겠습니다.”
적당히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레테가 좀 나아진 듯 인상을 폈다. 셰인이 크림 같은 거품을 조심스레 어깨에 얹었다. 편히 몸을 늘어뜨리고 눕자, 유즈가 부드럽게 뺨을 감쌌다. 적당한 체온에 녹은 크림과 오일이 부드럽게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두피와 머리카락, 온몸을 정성껏 마사지하며 시중을 드는 손길에 레테가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좀 낫네…….”
주인의 기분이 나아진 것을 기민하게 파악한 유즈가 찻잔을 들었다. 목을 받쳐 편안히 찻물을 넘길 수 있게끔 도운 유즈가 입을 열었다.
“두 친구분은 응접실에서 휴식 중이십니다.”
“둘? 누구?”
눈을 동그랗게 뜬 레테가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둘. 알았어. 식사는?”
“준비해두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단장하는 시간에 맞추어 안내하겠습니다.”
“좋아.”
칭찬을 받은 유즈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숙였다. 그런 유즈를 레테의 눈을 피해 매섭게 노려본 셰인이 레테의 종아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나른하게 탄성을 뱉은 레테가 칭찬하듯 짧게 웃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진 주인의 총애를 얻고자 물밑에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남자를 본 벨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 자신들은 한낱 사용인이고,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무가치한 남자 1, 2, 3에 불과할 텐데.
레테는 침실에 들인 남자를 결코 살려 보내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고, 하등의 가치를 두지 않았으며, 그 모든 것을 가볍게 덮을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슈가르드의 뱀이 뭘 삼켜도 무어라 항의할 자는 없었다. 그깟 평민 좀 죽었다고 정의롭게 검을 들 자가 과연 있겠는가.
결국, 주인의 기분에 따라 오늘내일 헤아리는 인생이다. 이슈가르드 최하층의 삶이 나은지, 이슈가르드 귀족의 시종이 나은지는 알 수 없을 뿐이다…
“벨.”
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인의 시종을 들며 다른 생각을 하다가 장미수를 바닥에 콸콸 붓고 있었다. 새하얀 바닥 위에 붉은 물이 흥건했다.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 그깟 게 있었다면 이 성의 지하실은 아늑하고 향기로웠겠지. 유즈와 셰인이 정적을 하나 제거해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레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벨은 사형선고를 기다렸다.
“심심하니?”
그는 고개를 숙였다. 레테의 몸에 비단처럼 부드러운 가운을 걸쳐 준 셰인이 주인에게 속삭였다. 성심을 다해 모셔야 할 주인 앞에서 감히 건방을 떨다니요. 그 옆에서 레테의 손을 잡아 걸음을 보조하며 유즈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규율을 어지럽히는 천박한 것의 목을 잘라 본을 세워야 합니다.
레테가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어가 욕실 안의 설렁줄을 당겼다. 세 번. 그 의미를 명확히 안 벨이 손을 덜덜 떨며 주저앉았고, 레테의 곁에 붙어 선 두 남자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주인님.”
레테의 모든 문제를 앞장서 처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레테는 마치 오늘의 날씨를 평가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 다 치워.”
“예.”
“주, 주인님.”
“주인님!”
그들이 간과한 것이라면 첫째로 레테의 성정이 너그럽지 않다는 것, 둘째로 레테의 기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셋째로 레테의 지하실은 언제나 새로운 자의 입장을 환영한다는 것, 넷째로 레테는 친구들이 쉬고 있는 이 집에서 건방을 떤 천것들을 용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 집이 천것들의 놀이터가 되었지?”
“관리를 엄중히 하지 못한 저희의 탓입니다.”
“됐어, 나 배고파.”
“곧 모시겠습니다.”
“옷.”
“준비해두었습니다.”
끌려나가는 세 남자의 입이 거칠게 틀어막혔다. 여섯 장정이 우악스레 그들을 끌고 저택의 은밀한 통로로 이어진 문을 열고 사라졌다.
레테는 한결 나아진 몸에 기지개를 켰다. 거칠게 뛰는 심장은 여전히 불쾌했으나, 연구를 위해 진한 차를 연거푸 들이켠 때와 비슷하다고 여기니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레테의 곁을 스무 해가 넘도록 지킨 집사가 익숙한 손길로 옷 시중을 들었다.
그는 본분을 지킬 줄 알았다. 그것은 곧 그의 목숨을 연명하는 방법과 직결되었고, 변덕스럽고 비정한 주인의 총애를 움켜쥘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 입안의 혀처럼 굴 것, 변화무쌍한 기분에 언제나 납작 엎드릴 것. 레테는 개처럼 엎드려 복종하는 충신에게 언제나 자비를 베풀었으므로.
그녀의 곁에서 건방을 떨다 목을 떨군 이들이 커르다스에 흩날리는 눈송이만큼 많았다. 그런 그들의 목숨을 손수 거두기도 하며 얼마나 기뻐했던가?
다만 안타까운 것은 주인의 몸에 생긴 이름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레테가 장갑을 끼며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안내하라는 뜻임을 알아챈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테의 곁에 서서 에스코트했다.
“둘은?”
“미리 모셨습니다.”
“좋아.”
“침실은 어찌 안내해드릴까요?”
“삼층. 둘 다.”
“알겠습니다.”
“아, 르네는 왼쪽이야. 레비는 오른쪽.”
“예.”
레테의 설명은 언제나처럼 불친절했으나 그는 무리 없이 알아들었다. 거대한 문을 열자 먼저 앉아서 기다리던 르네와 레비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르네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추운 건 어때? 괜찮아. 열은? 내렸어. 기침은 안 나? 응. 그 옆으로 레비가 달려왔다. 속은 괜찮아? 네 얼굴 보니 안 괜찮아. 말 다 했냐.
그는 조용히 의자를 빼 주고 퇴장했다. 이윽고 긴장을 익숙하게 감춘 시종들이 전채요리를 내왔다. 새것처럼 반짝이는 은제 나이프에 시종의 얼굴이 얼핏 비쳤다. 무심하게 시종의 뺨 위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레테의 시선에 그가 짧은 기대감을 품었다.
무소불위의 주인이 어쩌면 자신을 품고 총애해주지 않을까, 스무 해 동안 두텁게 쌓아 온 권력을 숨 쉬듯 휘두르는 그 집사처럼 어쩌면 자신도, 어쩌면.
그 천박한 기대감을 꿰뚫어 본 레테가 피식 웃었다. 레테가 잔을 가볍게 들었다.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손목을 움직이는 모양새는 분명 예의에 어긋난 것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그 태도를 탓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테가 입을 열었다.
“다른 잔으로.”
레테의 곁에 선 시종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자기들끼리 도란도란 떠들던 르네와 레비의 시선을 교묘히 피한 집사가 그 시종을 데리고 나갔다. 지하실의 세 시종과 합류하겠지. 짝도 맞겠다, 사이 좋게 놀던가. 새로운 잔을 들고 온 시종이 레몬수를 따랐다. 깔끔하게 입가심을 한 레테가 포크를 들었다.
해롭지 않은 것, 깨끗한 것, 친절한 것. 아무렇지 않게 포장한 레테가 능숙하게 두 친구의 대화에 참여했다.
레비 너 머리는 감았니? 너는 왜 시비냐? 키가 작아서 윗공기에 눌린 거구나, 미안. 너는 진짜 악마야. 나는 레리 말이 맞는 것 같아. 너도 악마야. 내 천사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니? 그래, 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너희 인성은 썩은 물 푸길이야.
정말 친절하시군. 레테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용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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